현직 10년차 신문기자의 세상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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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물·땅 다 있는데…" SK하이닉스가 부산에 반도체 공장 못 지은 진짜 이유

kim25kim 2026. 6. 11. 07:00

최태원 SK 회장.

 

"반도체 수요가 급증해 공장을 계속 지어야 합니다. 무조건 한국에만 짓겠다는 것은 아닐 수 있습니다."

 

지난 10일 일본 도쿄에서 들려온 SK그룹 최태원 회장의 발언이 대한민국 뉴스창을 뜨겁게 달구고 있습니다. 현재 SK하이닉스가 경기 용인에 짓고 있는 메가 클러스터 외에 '제2의 차기 반도체 공장'을 국내외 모두 열어두고 검토하겠다는 폭탄선언이었기 때문이죠.

 

그러면서 최 회장은 반도체 공장을 짓기 위한 4가지 필수 조건을 못 박았습니다.

 

"물, 땅, 인력, 전기 이 4가지가 모두 갖춰진 곳에만 짓겠다."

 

이 뉴스를 보자마자, 문득 몇 년 전 부산시 고위 공무원과 식사를 하며 나누었던 비밀스러운 대화가 떠올랐습니다. 당시 그 공무원은 눈을 반짝이며 "SK하이닉스 공장을 부산 기장군에 유치하려 했지만 실패했다"고 말했었죠.

 

당시엔 무모한 꿈이라 생각했던 그 ‘부산 유치전’. 최태원 회장이 제시한 4가지 조건을 대입해 보면, 놀랍게도 부산 기장은 전국에서 손꼽히는 치트키 같은 땅이 맞습니다. 하지만 왜 그 야심 찬 프로젝트는 소리 소문 없이 역사 속으로 사라졌을까요?

 

전기·물·땅: 부산 기장이 가졌던 압도적 스펙

최태원 회장이 말한 4가지 조건 중 3가지만 놓고 보면, 부산 기장은 현재 대기업들이 목숨 거는 용인 클러스터보다 훨씬 우월한 조건을 가졌습니다.

  • 전기 (대한민국 원탑): 현재 용인이 가장 골머리를 앓는 게 '전기 수급'입니다. 발전소는 지방에 있는데 송전탑을 세워 수도권으로 끌고 오기가 하늘의 별 따기이기 때문이죠. 반면 부산 기장에는 고리 원자력 발전소가 있습니다. 송전 손실 없이 대량의 청정 전력을 다이렉트로 공장에 꽂아 넣을 수 있는 세계 최고 수준의 전력 요충지입니다.
  • 물 (무한 리필): 내륙 공장은 공업용수 때문에 인근 지자체와 매번 피 터지는 물 싸움을 합니다. 하지만 부산은 바다를 끼고 있어 수자원 확보나 해수담수화 활용 면에서 행정적 제약이 훨씬 덜합니다.
  • 땅 (준비된 영토): 기장 일대의 의과학 산단이나 해안가 매립지 등 정부가 마음만 먹으면 용인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대규모 부지를 밀어버릴 수 있었습니다.

전기, 물, 땅. 4가지 중 3가지(75%)를 완벽하게 만족하는 땅. 부산시 공무원들이 "이거 무조건 유치할 수 있다"며 흥분했던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단 하나의 '통곡의 벽': 사람의 마음은 강제로 이주할 수 없다

그러나 이 완벽한 시나리오는 마지막 네 번째 조건인 '인력(People)'이라는 거대한 장벽 앞에 처참히 무너졌습니다. 현실적으로 현재 대한민국 반도체 생태계에서 부산은 '인력 수급 불가능 지역'이기 때문입니다.

 

1. "판교 라인도 멀다"… 반도체 남방한계선의 법칙

현재 반도체 업계에는 철옹성 같은 스카이라인이 존재합니다. 기흥, 화성, 평택을 거쳐 겨우 용인·이천까지 내려왔습니다. 석·박사급 젊은 엔지니어들은 "동탄 밑으로 내려가면 이직하겠다", "용인이 영끌 마지노선"이라고 공공연하게 말합니다. 경기도 아래로 내려가는 것도 기피하는 인재들이 서울에서 KTX로 2시간 반 거리인 부산 기장으로 내려간다? 현실성 제로에 가깝습니다.

 

2. 소부장(소재·부품·장비) 생태계의 고립

반도체는 SK하이닉스 혼자 만드는 게 아닙니다. 장비를 세팅하고 미세 공정을 관리하는 수백 개의 협력사 직원들이 매일 공장을 드나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소부장 기업의 90%가 경기도(수원, 평택, 화성)에 둥지를 틀고 있습니다. 공장 하나만 덜렁 부산에 지어놓으면, 밤중에 기계 하나 고장 났을 때 경기도에서 기술자가 내려오는 데만 반나절이 걸립니다. 분초를 다투는 수조 원짜리 라인에서 이 '물리적 거리'는 치명적인 리스크입니다.

 

최태원의 비명: "국내에 땅이 없는 게 아니라 사람이 없다"

최태원의 4대 조건 대한민국 수도권 (용인 등) 지방 거점 (부산 기장 등)
1. 전기 / 물 / 땅 ❌ 포화 상태, 송전로 부족, 물 싸움 극심 고리원전 인접, 수자원 풍부, 부지 확보 용이
2. 인력 (핵심) ⭕ 인재들이 선호하는 마지노선 반도체 남방한계선으로 핵심 인력 유치 불가능

 

결국 조건을 다 뜯어보면 최태원 회장이 "해외라도 가야지 어쩌겠냐"고 한 발언의 진짜 속뜻이 보입니다.

 

"수도권은 전기와 땅이 없어서 터지기 일보 직전인데, 그렇다고 조건 좋은 지방으로 내려가자니 일할 사람이 아무도 안 온다. 대한민국 안에서는 도저히 답이 안 나온다." 라는 대기업 총수의 소리 없는 비명인 셈입니다.

 

돈과 행정으로 해결할 수 있는 전기, 물, 땅은 준비되어 있었지만, '인재들의 마음'이라는 단 하나의 조건을 충족하지 못해 신기루처럼 사라진 부산 기장의 하이닉스 유치전.

 

지방 자치 단체들이 매번 "대기업 공장 유치"를 정치적 구호로 외치지만, 지방 대학을 살리고 인재를 분산시키는 '인력 생태계'를 먼저 만들지 않는다면, 앞으로 제2, 제3의 최태원이 나와도 지방은 늘 들러리만 서다 끝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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